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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PT도 제미나이도 없다—딥시크가 OpenRouter 장악한 1년의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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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픈라우터(OpenRouter)를 모르는 개발자는 거의 없을 것이다. 수백 개 AI 모델에 단일 API로 접근할 수 있는 이 플랫폼은, 어떤 모델이 실제로 쓰이는지 보여주는 가장 정직한 지표 중 하나다. 광고도 없고 투자사 입김도 없다. 그냥 누가 더 많이 호출되느냐.
2026년 7월, 그 리스트를 보고 멈칫했다. GPT가 없다. 제미나이도 없다. 상위 10위 안에 미국 모델은 앤트로픽 하나뿐이고, 나머지 아홉 자리는 딥시크, 텐센트, 미니맥스, Kimi, Zhipu 같은 이름들이 채우고 있다.
1년 전 오픈AI, 구글, 앤트로픽 합산 점유율은 70%였다. 지금은 30%다.
이 숫자가 과장처럼 들릴 수 있다. 실제로 봤다. 과장이 아니다.
1년 만에 지도가 바뀌었다
2025년 초 딥시크 쇼크를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이 흐름이 어디서 시작됐는지 알 것이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중국 모델이 OpenRouter 전체 트래픽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4.5%에 불과했다. 사람들이 "와, 성능이 이렇게 좋다고?" 하면서 테스트해보는 수준이었지, 본격적으로 갈아타진 않았다.
그게 2026년 2월부터 달라지기 시작했다. 미국 기업들이 OpenRouter에서 소비하는 토큰 중 중국 모델 비중이 2월 8일부터 매주 30%를 넘기 시작했다. 이후 최고 46%까지 찍었다. 지금은 안정적으로 40% 이상을 유지하고 있다.
딥시크 R1이 코딩과 추론에서 미국 모델과 비교되기 시작한 게 촉매였고, V3, V4로 이어지면서 개발자 생태계가 본격적으로 이동했다. 여기에 2026년 6월 Zhipu AI(現 Z.ai)가 출시한 GLM-5.2가 코딩 분야에서 새로운 기록을 세우면서 이른바 "딥시크 쇼크 시즌2"가 시작됐다. 시즌1이 "이게 되네"였다면, 시즌2는 "이제 이걸 안 쓸 이유가 없네"다.

딥시크 V4, 뭐가 달랐나
숫자부터 보자. 딥시크 V4 Flash는 입력 토큰 백만 개당 0.09달러, 출력 0.18달러다. 오픈AI GPT-5.5는 입력 5달러, 출력 30달러다. 배수로 따지면 입력에서 55배, 출력에서 166배 차이다.
스타트업에서 월 API 비용 100만 원과 1억 6,000만 원 차이가 나는데 성능이 비슷하다면 선택지는 하나다.
그런데 딥시크 V4를 그냥 "싼 중국 모델"로 보면 본질을 놓친다. 구조를 뜯어보면 이게 단순 가격 경쟁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V4 Pro는 MoE(Mixture-of-Experts) 아키텍처로 전체 파라미터 1.6조 개 중 실제 활성화되는 건 490억 개다. 컨텍스트 창은 100만 토큰. 이 스펙이면 에이전트 작업이나 장문 처리에서 어지간한 미국 최상위 모델과 경쟁이 된다.
V4 Flash는 여기서 한 번 더 경량화된 버전이다. 활성 파라미터 130억 개로 속도와 비용을 동시에 잡았다. 에이전틱 워크플로우에서 API를 여러 번 반복 호출하면 할수록 이 가격 차이는 기하급수적으로 커진다. 딥시크가 에이전트 개발자들에게 특히 인기를 끈 이유가 여기 있다. OpenRouter 데이터를 보면 딥시크의 성장을 이끈 게 바로 에이전틱 워크플로우 트래픽이다.
5월부터 딥시크는 OpenRouter에서 단일 공급자 기준 1위를 유지하고 있다. 전체 토큰의 약 16~20%가 딥시크를 통해 처리된다.

딥시크 혼자가 아니다
OpenRouter 상위 10위를 차지한 중국 모델이 딥시크 하나였다면 이야기가 달랐을 것이다. 현실은 여러 중국 랩이 각자의 특기를 가지고 시장을 나눠 먹고 있다.
텐센트의 Hy3 Preview는 멀티모달 이해에서 강점을 보이며 2위권에 들어와 있다. Moonshot AI의 Kimi K2.6은 1M 토큰 컨텍스트 창을 기반으로 장문 처리 분야를 파고들었다. MiniMax M2.5는 실시간 대화와 음성 처리에서 두각을 나타낸다. Zhipu의 GLM-5.2는 코딩에서 GPT-5 시리즈를 앞선다는 벤치마크 결과가 나오면서 개발자들 사이에서 빠르게 퍼졌다.
각자 다른 영역을 먹고 있다는 게 포인트다. 딥시크가 에이전트, Kimi가 장문, GLM이 코딩, MiniMax가 대화를 잡으면서 중국 모델들이 서로 충돌하지 않고 미국 모델의 영역을 잠식하고 있다.
이 중 대부분이 오픈소스다. 가중치를 공개하거나 최소한 무료 티어를 제공해서 개발자들이 로컬에서 실험해볼 수 있게 한다. OpenAI가 GPT를 블랙박스로 유지하는 동안 중국 랩들은 커뮤니티에 모델을 풀고 생태계를 키웠다.
앤트로픽만 살아남은 역설
여기서 이상한 점이 하나 있다. 오픈AI도 구글도 밀려났는데 왜 앤트로픽만 버텼을까.
OpenRouter에서 앤트로픽의 점유율은 15.5%, 딥시크에 이어 단독 2위다. 이게 가격 경쟁력 때문이 아니라는 건 확실하다. Claude Opus 4.8은 입력 5달러, 출력 25달러로 GPT-5.5와 사실상 같은 가격대다.
차이는 수요의 성격이다. 앤트로픽을 쓰는 고객 상당수는 법무, 의료, 금융 쪽이다. 이 영역에서는 "가장 싼 모델"이 아니라 "가장 안전하고 믿을 수 있는 모델"을 원한다. 규제 산업에서는 데이터를 중국 서버로 보내는 것 자체가 법적으로 불가능한 경우도 있다. 중국 모델이 성능이 아무리 좋아도 물리적으로 대체 불가한 수요가 있다.
솔직히 이게 역설적으로 앤트로픽의 전략이 맞았다는 증거 같다. 저가 경쟁을 처음부터 포기하고 "가장 안전한 AI"라는 브랜드에만 집중한 포지셔닝이, 중국 모델이 가격과 성능으로 시장을 휩쓸 때 살아남게 한 것이다.
반면 오픈AI는 어중간해졌다. 비싸면서도 성능으로 압도하지 못한다는 인식이 퍼지면서 "그래서 GPT를 왜 쓰냐"는 질문이 생겼다. 구글 제미나이는 더 모호하다. 개발자 채택이 기대만큼 안 된 상태에서 중국 모델의 공세를 맞았다.
이 숫자가 말하는 것
한 가지 맥락은 짚고 넘어가야 한다. OpenRouter는 주로 개인 개발자, 스타트업, 프리랜서들이 사용하는 플랫폼이다. 마이크로소프트 Azure나 구글 클라우드를 통해 GPT나 제미나이를 도입한 대기업 고객들은 이 데이터에 거의 잡히지 않는다.
그러니 이 숫자를 "AI 시장 전체에서 중국이 이겼다"로 읽으면 과장이다.
하지만 "차세대 개발자들이 어떤 모델에 익숙해지고 있는가"로 읽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지금 스타트업에서 딥시크 V4로 에이전트를 만들고 있는 개발자가 5년 뒤 엔터프라이즈 솔루션을 설계할 때 어떤 모델을 먼저 검토할까. 생태계 전쟁은 늘 이렇게 저변에서 시작된다.
오픈AI와 구글이 느끼는 압박도 여기서 온다. 당장의 수익 이전에 개발자들이 어떤 모델을 기본값으로 삼느냐가 5년 뒤 시장 지형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2025년 1월 딥시크 R1이 나왔을 때 "일시적 충격"이라고 본 사람들이 많았다. 18개월이 지난 지금, 데이터는 그게 구조적 지각변동의 시작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중국이 오픈소스 전략으로 개발자 생태계를 먼저 장악하고, 앤트로픽이 프리미엄 신뢰 시장에서 살아남고, 오픈AI와 구글이 새로운 차별화 포인트를 찾지 못한 채 흔들리고 있다. 이게 2026년 7월의 AI 지형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