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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비디아·브로드컴이 한국에 몰린 이유—SK 5000억달러·삼성 290조 AI 동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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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24일 샌프란시스코. 이재명 대통령이 젠슨 황, 샘 올트먼, 다리오 아모데이를 줄줄이 만났다는 뉴스가 나온 바로 다음 날, 숫자들이 터져 나왔다.

SK와 엔비디아 5,000억 달러(약 690조 원). 삼성전자와 브로드컴 2,000억 달러(약 290조 원). 엔비디아가 네이버에 단독 10억 달러 직접 투자. 미디어에선 이 딜들을 모아 "한미 AI 빅딜 총 1,375조 원"이라고 불렀다. 하루 사이에 나온 숫자 치고는 너무 크다.

정치적 연출인지, 진짜 사업인지 따져봐야 할 것 같아서 좀 뜯어봤다.

SF AI 서밋, 한미 AI 동맹 체결 현장

SK-엔비디아, 5,000억 달러짜리 약속

의향서(LOI)라는 걸 먼저 짚어야 한다. SK와 엔비디아가 체결한 건 법적 구속력이 약한 LOI다. 실제 계약서가 아니라 "이 방향으로 가겠다"는 선언에 가깝다. 그러니까 5,000억 달러가 내일 당장 오가는 돈이 아니다.

그런데 내용이 꽤 구체적이다.

SK텔레콤은 엔비디아의 DSX 플랫폼 기반으로 국내 최대 규모 AI 팩토리 2GW를 단계적으로 구축한다. 여기에 들어가는 칩이 엔비디아 차세대 GPU '베라 루빈(Vera Rubin)'이고, 이 칩에 SK하이닉스의 HBM4가 탑재된다. 2027년부터 단계적 가동 예정이다.

2GW가 어느 정도 규모냐면, 150만 가구에 전력을 공급할 수 있는 수준이다. 지금 국내에서 돌아가는 데이터센터 전력 소비량 전체와 맞먹는다는 계산도 있다. 현실적으로 2027년에 이걸 풀 가동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봐야 하고, "최대 2GW"라는 표현 자체가 장기 목표에 가깝다. 그러나 초기 단계만 해도 엄청나다.

SK 쪽에선 SKT가 AI 팩토리를 운영하고, SK하이닉스가 HBM 공급을 담당하는 역할 분담이 이뤄진다. 최태원 회장이 SF에서 직접 젠슨 황과 만나 이 그림을 그렸다. 엔비디아 입장에서는 다음 세대 GPU에 들어갈 HBM 물량을 미리 확보하는 동시에, 아시아-태평양 AI 인프라 거점 하나를 심는 셈이다.

마이크로소프트와 앤트로픽도 이번 SK 딜에 일부 합류했다. SK하이닉스로부터 메모리 장기 공급 협력을 맺었다는 보도가 있었다. 앞으로 고성능 메모리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날 것을 감안하면 이상한 움직임은 아니다.

삼성이 잡은 패—브로드컴과 290조 원

같은 날 삼성전자도 조용히 큰 딜을 쐈다. 브로드컴과 2030년까지 5년간 2,000억 달러(약 292조 원) 규모의 전략적 MOU를 체결한 것이다.

내용은 두 갈래다. 첫째, 삼성전자가 HBM을 포함한 최첨단 메모리를 브로드컴의 AI 가속기 칩에 공급한다. 둘째, 브로드컴의 차세대 고속 데이터 통신용 반도체를 삼성 파운드리의 2나노 이하 공정으로 만든다.

메모리와 파운드리를 동시에 묶어 '턴키' 체계를 짜겠다는 구조다. 단순 부품 공급이 아니라 설계부터 생산까지 같이 가겠다는 얘기다.

HBM4 반도체 칩과 AI 메모리 기술

솔직히 삼성 입장에서 이번 딜은 꽤 중요하다. SK하이닉스에 HBM 주도권을 빼앗긴 이후 삼성이 반격을 꾀하고 있는데, 브로드컴이라는 확실한 수요처를 잡은 건 실질적인 성과다. 브로드컴은 구글의 TPU, 메타의 MTIA 같은 커스텀 AI 칩을 설계하는 회사다. 빅테크들이 엔비디아 GPU 의존도를 낮추려고 자체 칩을 설계할 때 브로드컴이 중간에 끼어 있다. 그 브로드컴의 생산을 삼성이 맡겠다는 것이다.

SK가 엔비디아 라인으로 간다면, 삼성은 브로드컴 라인으로 간다. 한국 반도체가 글로벌 AI 칩 생태계의 두 축을 동시에 파고드는 그림이다.

네이버가 받은 14조의 의미

이재용도 최태원도 아닌 이해진 네이버 창업자가 이번 서밋에 참석한 것 자체가 흥미로웠다. 그리고 네이버는 엔비디아로부터 10억 달러, 브룩필드로부터 추가 투자를 합쳐 총 약 14조 원 규모의 투자를 유치했다.

쓰임새는 AI 팩토리다. 현재 55MW 수준인 데이터센터를 200MW로 키우고, 장기적으로는 1GW까지 확대해 한국을 아시아 AI 컴퓨팅 허브로 만들겠다는 계획이다.

엔비디아가 네이버에 직접 투자하는 건 단순한 재무적 베팅이 아니다. 엔비디아 입장에서 네이버는 한국어 AI 생태계의 핵심 플레이어다. 클로바X, 하이퍼클로바X 같은 대형 언어모델을 자체 운영하는 네이버가 엔비디아 GPU 기반 인프라를 확장하면, 엔비디아 입장에서는 아시아 소버린 AI 시장에 발판을 하나 더 심는 셈이다.

서울 기준으로 보면 네이버 데이터센터가 아시아 AI 서비스 허브가 되는 시나리오다. 아직 "계획"이지만, 14조라는 자금이 등 뒤를 받치고 있으니 현실성은 있다.

왜 지금, 왜 한국인가

글로벌 빅테크가 한국에 이렇게 몰린 이유는 결국 두 가지로 압축된다.

HBM. AI 가속기에서 병목은 GPU 코어가 아니라 메모리 대역폭이다. 엄청난 양의 데이터를 빠르게 칩에 공급하지 못하면 아무리 연산력이 좋아도 소용없다. 그 병목을 풀어주는 게 HBM이다. 그리고 지금 세계에서 HBM을 제대로 만들 수 있는 회사는 SK하이닉스와 삼성전자뿐이다. 마이크론이 있긴 하지만 아직 격차가 크다.

탈중국 공급망. 미중 반도체 갈등이 심화되면서 글로벌 빅테크 입장에서는 중국 의존도를 낮출 대안이 필요해졌다. 한국은 지정학적으로 미국 동맹국이고, 반도체 기술력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공급망 다각화의 최선 선택지가 한국이 된 것이다.

이재명 대통령의 SF 순방이 이 모든 딜의 촉매가 됐다는 건 맞는 얘기다. 그러나 촉매는 반응 속도를 높일 뿐, 재료 자체를 만들지는 못한다. 엔비디아가 SK를, 브로드컴이 삼성을 선택한 건 결국 HBM 기술력 때문이다. 정치적 계기가 없었어도 이 방향으로 흘러갈 거라고 생각한다.

글로벌 AI 데이터센터 인프라 구축 조감도

1,375조가 다 실현될까?

LOI와 MOU는 약속이지 계약이 아니다. 5,000억 달러는 5년 이상에 걸친 의향이고, 시장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축소되거나 조정될 수 있다. 2021년 삼성이 미국에 파운드리 170조 투자를 선언했다가 규모를 크게 줄인 선례도 있다.

그래도 방향성은 명확하다고 본다. AI 가속기 수요는 계속 늘어날 것이고, HBM 없이는 GPU 만들 수 없다. 엔비디아와 브로드컴이 한국 반도체 없이 AI 칩을 찍어내는 시나리오가 단기간에 등장하긴 어렵다.

한 가지 더 봐야 할 게 있다. 삼성과 SK가 같은 날 각자 다른 빅테크와 딜을 맺었다. 엔비디아-SK, 브로드컴-삼성. 두 회사가 경쟁하면서도 각자의 글로벌 파트너를 확보했다. 내부 경쟁이 오히려 한국 전체의 협상력을 높이는 구조다.

1,375조가 전부 현실이 되진 않겠지만, 절반만 됐다고 해도 한국 AI 반도체 산업은 완전히 달라진다. 그게 더 중요한 숫자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