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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이 젠슨 황·샘 올트먼·다리오 아모데이를 하루에 다 만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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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24일 새벽, 샌프란시스코 현지에 도착한 이재명 대통령의 일정표는 이례적이었다. 다리오 아모데이 앤트로픽 CEO, 샘 올트먼 오픈AI CEO, 젠슨 황 엔비디아 CEO, 혹탄 브로드컴 CEO를 하루 안에 순차적으로 면담하는 스케줄. 글로벌 AI 4대 거물을 단 하루에 만나는 국가 정상은 손에 꼽을 것이다. 나는 이 라인업을 보자마자 단순한 외교 행사가 아님을 직감했다.

정재계 올스타가 동행한 이유
눈에 띄는 건 대통령만이 아니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최태원 SK그룹 회장,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 이해진 네이버 이사회 의장이 나란히 비행기에 올랐다. 4대 그룹 총수가 대통령 순방에 동행하는 건 사실 드문 일이 아니지만, 이번엔 목적지가 다르다. 워싱턴이 아닌 실리콘밸리다.
이 조합이 무엇을 뜻하는지 생각해봤다. 정치(대통령)와 메모리 반도체(삼성·SK)와 자동차·로봇(현대차)과 인터넷 플랫폼(네이버)이 한 팀으로 움직인다는 건, 한국 산업 생태계 전체가 AI 공급망 협상 테이블에 앉겠다는 메시지다. 그것도 AI를 만드는 회사들이 가장 많이 모여 있는 곳, 실리콘밸리에서.
행사에는 글로벌 빅테크 CEO 150여 명이 참석하는 AI 서밋도 포함됐다. 사실 이 숫자가 더 인상적이다. 단발성 면담이 아니라, 한국과 실리콘밸리 사이에 지속적인 채널을 여는 이벤트다.
각 CEO와의 면담에도 의미가 다 다르다. 다리오 아모데이와의 만남은 미토스 기반 한국형 AI 협력 구도를, 샘 올트먼과의 만남은 오픈AI의 한국 데이터센터 투자 의향을, 젠슨 황과의 만남은 차세대 GPU 공급 물량 협의를 각각 포함했을 가능성이 높다. 혹탄 브로드컴 CEO를 끼운 것도 흥미롭다. 브로드컴은 AI 네트워킹 칩과 커스텀 AI 가속기 분야의 강자다. 삼성이 이 쪽과 손을 잡으면 HBM 단독 공급에서 벗어나 더 다양한 AI 반도체 포트폴리오를 그릴 수 있다.
"대체 불가능한 국가"를 선언하다
이재명 대통령은 이날 '샌프란시스코 AI 선언'을 발표했다. 내용의 핵심은 하나다. 한국이 글로벌 AI 생태계에서 "대체 불가능한 공급 파트너"가 되겠다는 것.
선언에는 "모두의 AI", AI 기본 사회처럼 윤리적 비전도 담겼다고 한다. 솔직히 그 부분은 어느 나라나 하는 말이라 크게 다가오지 않았다. 내가 주목한 건 따로 있다. 한국이 처음으로 국가 차원에서 AI 공급망의 위치를 명시적으로 규정했다는 점이다. "AI를 개발하는 나라"가 아니라 "AI를 만들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나라"로 스스로를 포지셔닝했다.
메모리 반도체, 특히 HBM(고대역폭 메모리) 없이 AI 학습을 돌릴 수 없다는 건 이미 업계 상식이다. 엔비디아의 GPU도, 앤트로픽의 클로드도, 오픈AI의 GPT도 결국 삼성·SK의 HBM 위에서 돌아간다. 한국이 이 위치를 외교 무기로 공식화한 것이다.

선언 뒤에 숨겨진 돈의 흐름
미사여구보다 더 중요한 건 계약서다.
이번 행사에서 가장 실질적인 의미가 있는 건 삼성전자·SK하이닉스와 글로벌 빅테크 사이의 장기 공급계약(LTA) 협상이다. 3대 메가프로젝트 발표 이후 삼성과 SK가 서남권에 약 896조 원의 투자를 약속했는데, 이 투자를 받쳐줄 수요처가 필요하다. 오픈AI, 마이크로소프트, 구글 같은 빅테크들이 멀티년 단위 HBM 물량을 확정해줘야 삼성과 SK가 실제로 그 돈을 쓸 수 있다.
LTA가 체결되면 구조가 이렇게 된다. 한국 반도체 기업이 장기 수요를 확보하고, 그 수요를 담보로 대규모 설비 투자를 단행한다. 반도체 공급이 늘면 AI 연산 비용이 내려가고, AI 서비스 가격이 낮아진다. 미국 빅테크 입장에서는 안정적 공급망을 확보하면서 가격 협상력도 생긴다. 나쁠 게 없는 딜이다.
국민연금도 빠지지 않았다. 앤드리슨 호로위츠(a16z), 세쿼이아 같은 실리콘밸리 주요 벤처캐피털과 MOU를 체결한다고 알려졌다. 단순한 협약이 아니다. 국민연금이 실리콘밸리 AI 스타트업 생태계에 직접 자금을 집어넣겠다는 신호다. 한국 퇴직연금이 실리콘밸리의 다음 AI 챔피언을 키우는 LP가 되는 그림이다.
이 구조는 꽤 영리하다. 정부가 직접 AI 기업에 투자하면 정치적 부담이 생긴다. 하지만 국민연금이 a16z나 세쿼이아의 펀드에 들어가는 건, 수익을 추구하는 기관투자자의 정상적인 행동이다. 동시에 그 자금이 실리콘밸리 AI 생태계를 키우고, 그 생태계는 다시 삼성·SK의 반도체 수요를 창출한다. 한국 연금 가입자 입장에서도 나쁜 딜이 아닐 수 있다.
3대 메가프로젝트가 이 자리를 만들었다
이번 실리콘밸리 방문은 갑자기 나온 게 아니다. 이재명 정부 출범 이후 발표된 3대 메가프로젝트—반도체, AI 데이터센터, 피지컬 AI(로봇)—가 배경이다.
서남권에 896조 원 규모의 반도체 클러스터를 조성하고, 울산·동해·세종 등지에 GW급 AI 데이터센터를 짓겠다는 계획에는 총 550조 원이 투입된다. 로봇 분야에서는 새만금과 대구경북권에 K-로봇 성장축을 만들고, 휴머노이드를 산업현장에 확산시키는 방향이다. 이 세 축이 연결되면 한국이 AI 연산 인프라(데이터센터)와 AI 학습 재료(HBM)와 AI 응용 기기(로봇)를 모두 공급하는 나라가 된다.
반도체 부분에서 한 가지 주목할 숫자가 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서남권(전남·전북 일대)에 약속한 투자 규모가 896조 원이다. 이 돈이 실제로 집행되려면 수요 확신이 필요하다. 투자 발표가 아무리 크더라도 수요처 없이는 공장을 못 짓는다. 빅테크들이 장기 계약을 확정해주면 삼성과 SK는 비로소 삽을 뜰 수 있다.
그러니까 샌프란시스코 AI 선언은, 이 그림을 실리콘밸리 앞에서 처음으로 공식 발표한 자리다. 선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896조 원짜리 투자에 수요를 붙이기 위한 외교전의 일환이다.

선언보다 계약서가 진짜다
나는 이번 순방을 긍정적으로 본다. 하지만 한 가지는 솔직하게 말하고 싶다.
선언은 선언이다. 실제로 얼마만큼의 계약이 체결됐느냐, 숫자는 얼마냐, 조건은 뭐냐—이게 없으면 샌프란시스코 AI 선언은 또 하나의 멋진 문서로만 끝날 수 있다. 정부발 MOU는 많이 봐왔는데, 실제 이행율이 항상 좋지는 않았다.
이번엔 조금 다를 것 같긴 하다. 이재용·최태원이 직접 나타났다는 건, 기업들이 진짜 계약을 닫으러 갔다는 뜻이다. 외교부가 차관급 파견해서 MOU 체결하는 거랑 재벌 총수가 직접 가서 협상 마감하는 건 차원이 다르다. 분위기도 있고, 의사결정 속도도 다르다.
미중 갈등이라는 변수도 있다. 한국이 미국 AI 공급망에 본격적으로 편입된다는 건, 중국과의 관계에서 리스크가 생길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삼성전자는 중국 반도체 시장에서 수익의 일부를 여전히 가져온다. 이 균형을 어떻게 관리하느냐가 앞으로 한국 AI 전략의 숨겨진 숙제다.
한 가지 더. 이번 방문이 외교적으로 성공했다 해도, 결국 기술 경쟁력이 뒷받침돼야 한다. 젠슨 황이 웃으면서 악수해줬다고 HBM4 기술 격차가 좁혀지는 건 아니다. 삼성전자가 SK하이닉스에 밀리고 있는 HBM 품질 문제, 적층 기술 수율 이슈는 외교 선언이 해결해주지 않는다. 큰 그림을 그리는 것과 디테일을 실행하는 건 다른 차원의 이야기다.
10년 넘게 IT 블로그를 하면서 "게임 체인저"라는 표현을 함부로 쓰지 않으려 노력해왔다. 그런데 이번 샌프란시스코 장면은, 적어도 한국이 AI 시대의 포지션을 재정의하려는 의지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 선명하게 보여줬다고 생각한다. 이제 선언을 계약으로 바꾸는 일이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