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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버린 AI에 5조 베팅—한국이 AI 종속국 탈출에 나선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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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2일, 미국 상무부가 앤트로픽의 미토스5(클로드 페이블5) 수출을 전격 차단했을 때, 한국 AI 업계는 제대로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서비스 중단 자체도 문제였지만, 더 무서운 건 "우리가 이토록 빅테크에 의존해 있었나"라는 자각이었다. 클릭 하나로 차단됐고, 클릭 하나로 복구됐다. 그 과정에서 한국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 충격이 현실 정책으로 바뀌는 데 고작 3주가 걸렸다. 7월 2일,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반도체 호황으로 쌓인 초과세수 중 5조원을 투입해 '소버린(주권) AI' 모델을 자체 개발하겠다고 밝혔다. 한국경제가 단독으로 보도한 이 계획은 조용히 퍼졌지만, 의미는 가볍지 않다.

5조로 무엇을 사려는가

핵심은 엔비디아 베라루빈(Vera Rubin) GPU 모듈 1만 개다. 베라루빈은 엔비디아의 현존 최첨단 슈퍼칩으로, 전임 블랙웰을 아득히 넘는 성능이다. 1만 개면 오픈AI나 앤트로픽이 프런티어 모델을 돌리는 클러스터와 비슷한 규모의 컴퓨트를 구성할 수 있다.

5조원은 이 GPU를 확보하고, 세계 최정예 AI 연구 인력을 영입하는 데 필요한 금액이다. 과기정통부는 추경 예산이 확보되는 즉시 집행에 들어갈 방침이다.

프런티어 AI 모델이란 GPT-5.6이나 미토스5 같은 최상위급 모델을 말한다. 단순한 서비스용 AI가 아니라 다른 AI 모델들의 기반이 되는 '기반 모델'이다. 한국이 이 계층에 진입하지 못하면, 국내 AI 산업 전체가 미국 빅테크의 API 요금제에 종속될 수밖에 없다.

엔비디아 베라루빈 GPU가 가득한 AI 데이터센터

국가대표 AI, 지금 어디쯤 왔나

소버린 AI 프로젝트, 정확히는 '국가대표 AI'라고 불리는 이 사업은 사실 올해 처음이 아니다. 작년부터 정부가 지원하는 독자 AI 파운데이션 모델 개발 프로젝트가 진행 중이었고, 현재 4개 팀이 남아 있다. LG AI연구원, SK텔레콤, 업스테이지, 모티프테크놀로지스다.

여기서 가장 눈에 띄는 이름은 있는 것이 아니라 없는 이름이다. 네이버가 탈락했다.

네이버클라우드는 '소버린 AI'라는 개념을 국내에서 가장 먼저 외쳤고, 하이퍼클로바 시리즈로 독자 LLM의 저력을 보여준 기업이다. 그런 네이버가 1차 평가에서 떨어졌다. 이유는 뼈아프게 단순했다. 중국 알리바바 오픈소스 AI 모델 큰(Qwen)의 '비전 인코더'를 활용했다는 것이다. 정부는 가중치를 제로 상태에서 스스로 만들어야 독자 모델로 인정한다는 기준을 고수했고, 네이버는 그 선에서 걸렸다.

솔직히 이 부분은 논란이 있다. 비전 인코더 하나를 가져다 썼다고 전체 모델의 독자성이 없다는 게 과연 합리적인 평가인지. AI 업계에서 레이어 하나도 처음부터 다 만드는 기업은 없다. 오픈소스 활용은 상식이다. 하지만 정부의 기준은 엄격했고, 네이버는 재도전도 안 하겠다고 밝혔다.

분산에서 집중으로

원래 이 프로젝트는 여러 팀을 경쟁시키는 방식이었다. 그런데 7월 2일 보도에서 전략 변화의 신호가 감지된다. 과기정통부가 베라루빈 GPU 1만 개를 "정예 한 팀에 몰아주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는 것이다.

선택과 집중이다.

독자 프런티어 AI 모델을 개발 중인 한국 AI 연구팀

나는 이 방향 전환이 맞다고 본다. 5조를 4개 팀에 나눠주면 팀당 1조 남짓이다. 그 돈으로 오픈AI나 앤트로픽과 경쟁할 수 있을까. 불가능하다. 5조를 한 팀에 몰아줘도 빅테크의 투자 규모 앞에선 작다. 최소한 컴퓨트 집중이라도 해야 한다.

문제는 그 '정예 한 팀'을 어떻게 고르느냐다. LG AI연구원, SKT, 업스테이지, 모티프테크놀로지스. 각각의 강점이 다르고, 정치적 고려도 없을 수 없다. 이 결정이 국가 AI 전략의 실질적인 분기점이 된다.

골든타임이 얼마 남지 않았다

AI 전문가들이 요즘 같은 말을 반복한다. "빅테크에 더 뒤처지면 AI 종속국으로 전락한다." 실제로 앤트로픽, 오픈AI, 구글 딥마인드의 최고 모델과 국내 최고 모델 사이의 성능 격차는 좁혀지는 게 아니라 벌어지고 있다.

이건 단순한 기술 자존심 문제가 아니다. 의료, 교육, 공공, 국방—AI가 인프라처럼 깔리는 분야에서 외국 AI에 의존하면 무슨 일이 생기는지 미토스5 차단이 이미 보여줬다. 6월 12일부터 6월 30일까지 18일. 특정 AI 모델이 서비스 중단되면 병원 진단 시스템이 멈추고, 정부 행정이 마비될 수 있는 미래가 생각보다 빨리 오고 있다.

정부는 8월에 현재 개발 중인 소버린 AI 모델 일부를 오픈소스로 공개할 계획이라고 한다. 그걸 보면 지금 수준이 어디쯤인지 대략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늦었지만 맞는 방향

10년 넘게 블로그를 해오면서 정부 IT 프로젝트가 용두사미로 끝나는 걸 수없이 봤다. 과기정통부의 이 계획도 추경 통과라는 장벽이 남아 있고, 인력 영입, 팀 선정, 실제 집행까지 변수가 한둘이 아니다.

그래도 방향은 맞다. 5조가 크게 느껴지지만 글로벌 AI 전쟁에서는 초라한 금액이다. 하지만 안 하는 것보단 낫고, 늦었다고 포기할 시점도 아니다. 네이버·카카오 같은 민간이 이 격차를 독자적으로 메우긴 어렵다. 정부가 컴퓨트 인프라를 깔고 공동 연구 플랫폼을 제공하는 구조로 가야 한국 AI 생태계가 살아남을 수 있다.

오픈AI가 챗GPT를 처음 내놓은 게 2022년 말이다. 그 이후 3년 반 동안 한국은 AI를 '활용'하는 나라였다. 이제 처음으로 AI를 '만드는' 나라가 되려 한다. 늦었지만, 지금이 유일한 타이밍이다.

글로벌 AI 경쟁에서 독자 모델로 승부수를 던지는 한국

8월에 첫 공개 모델이 나오면 직접 써보고 얼마나 쓸 만한지 평가해볼 생각이다. 아직은 기대보단 궁금증이 앞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