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Published on
중국이 H200 안 사는 진짜 이유 — 엔비디아 수출 허가 났지만 납품 0건
- Authors
- Name
5월 13일, 알래스카 앵커리지 공항. 에어포스원이 급유를 위해 내려앉자 젠슨 황 엔비디아 CEO가 트랩 앞에 서 있었다. 트럼프 대통령이 직접 전화해 "비행기 타고 같이 가자"고 했다는 건데, 베이징으로 향하는 대통령 전용기에 빅테크 CEO가 동승한 건 이례적인 장면이었다.
당연히 시장은 들썩였다. 반도체주가 일제히 올랐고 SK하이닉스는 200만 원 고지 코앞까지 갔다. 이 화제의 동승에는 분명한 메시지가 있었다. H200 — 엔비디아의 고성능 AI칩 — 의 중국 수출 빗장을 여는 문제가 이번 미중 정상회담의 핵심 의제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결과는 허탕이었다.

허가는 났는데 납품이 0건?
미국 상무부는 이미 H200의 제한적 대중 수출을 허가한 상태다. 알리바바, 텐센트, 바이트댄스, JD닷컴 등 중국 주요 기업 10곳에 구매 허가를 내줬다. 기업당 최대 7만5,000개라는 한도가 붙었지만, 어쨌든 문은 열렸다.
그런데 지금까지 실제로 팔린 게 없다.
트럼프는 인터뷰에서 "중국이 H200을 안 사기로 했다"고 밝혔다. 중국 정부가 자국 기업들의 H200 구매 허가 신청을 사실상 막고 있기 때문이다. '기술 자립' 노선이 여전히 살아 있는 것이다.
이 상황은 조금 기묘하다. 미국은 팔겠다 하고, 중국은 안 산다고 한다. 수출 통제 갈등이 "미국이 못 팔게 하는 문제"였다면, 지금은 "중국이 사지 않는 문제"로 바뀌어 있다.
중국이 거부하는 이유
중국 정부의 계산은 단순하다. H200을 사기 시작하면 첨단 AI 인프라를 미국 칩에 의존하게 된다. 그 의존성은 다음 협상에서 약점이 된다. 미국이 또 수출 통제를 강화하면 그때 가서 아무것도 못 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화웨이가 좋은 선례다. 한때 미국 부품과 소프트웨어에 전적으로 기댔던 화웨이가 제재를 맞고 나서 3~4년 걸려 자국산 칩(어센드 910B, 910C)과 자체 OS까지 만들어냈다. 중국 AI 기업들도 그 길을 가려 한다.
실제로 중국 정부는 자국 기업들에게 화웨이 어센드 칩을 쓰도록 장려하고 있다. H200보다 성능이 뒤진다는 건 알지만, 공급 안정성 측면에서는 훨씬 낫다는 판단이다. 단기 손해를 감수하고 장기 기술 독립을 택하는 구도다.
5월 15일 정상회담 직후 미국 무역대표부(USTR)는 공식적으로 "반도체 수출 통제는 이번 회담의 주요 의제가 아니었다"고 밝혔다. 이 한 줄로 젠슨 황의 에어포스원 동승이 뭘 이뤘는지 어느 정도 정리된다.

젠슨 황은 왜 포기하지 않나
그래도 젠슨 황은 낙관론을 버리지 않는다. "중국은 결국 미국산 AI칩을 열 것"이라는 게 그의 입장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미국 AI혁명을 주도하길 원한다"는 말도 했다.
현실적으로도 맞는 말이다. H200보다 성능이 나은 AI칩을 중국이 자체 생산하려면 최소 2~3년이 더 걸린다는 게 업계 대체적인 평가다. 그 기간 동안 중국 AI 기업들이 경쟁력을 유지하려면 어느 시점엔 고성능 칩이 필요해진다.
블랙웰 시리즈까지 밀반입 사례가 나오는 걸 보면, 수요 자체가 없는 게 아니다. 중국 정부의 명령과 실제 기업 수요 사이의 괴리는 점점 커질 수 있다.
문제는 타이밍이다. 미국의 수출 허가와 중국의 구매 의향이 맞아떨어지는 시점이 언제 올지, 혹은 오기나 할지가 불확실하다. 정치는 시장보다 훨씬 느리게 움직이고, 체면 문제가 걸린 협상은 더더욱 그렇다.
한국 반도체, 이 싸움의 구경꾼인가
HBM 얘기를 안 할 수 없다. H200에는 SK하이닉스의 HBM3e가 들어간다. H200이 중국에 팔린다면 HBM 수요가 그만큼 늘어난다. 단순 계산으로도 7만5,000개짜리 허가 10건이면 75만 개의 H200 — HBM 탑재량으로 치면 엄청난 수치다.
SK하이닉스는 2026년 HBM4 시장에서 5455%의 점유율을 유지할 것으로 전망된다. 삼성전자는 HBM4 양산을 올해 2월 시작했고, AMD에 납품하면서 점유율을 2829%까지 끌어올렸다. 마이크론이 나머지를 나눠 갖는 구도다.
H200의 중국 수출이 실제로 이뤄지면 이 시장 전체가 한 단계 더 커진다. 그래서 5월 13일 SK하이닉스와 삼성전자 주가가 한꺼번에 올랐던 것이다.
솔직히 말하면, 이걸 호재로 완전히 기대하기엔 아직 이르다. 한국 반도체 입장에서 H200 대중 수출 이슈는 외부 변수다. 미중 정치 협상의 결과를 기다려야 한다는 뜻인데, 그 결과는 지금 보다시피 "아직 아무것도 없다"다.

역설의 구조
10년 블로그 하면서 이렇게 이상한 무역 구조는 처음 본다. 파는 쪽은 팔고 싶다, 사는 쪽 국민(기업)도 사고 싶다, 근데 사는 쪽 정부가 막는다. 수출 통제는 보통 파는 쪽이 막는 건데, 지금 막는 건 사는 쪽이다.
이 역설이 언제까지 지속될지가 핵심이다. 중국 AI 기업들의 경쟁력 갭이 벌어질수록 정부도 입장을 바꿀 수밖에 없다는 게 젠슨 황의 논리고, 그 논리엔 설득력이 있다. 하지만 시진핑 체제에서 "체면 포기"가 어떤 형태로 일어날지는 전혀 다른 문제다.
에어포스원에 탔던 젠슨 황은 지금쯤 이 싸움이 단기전이 아님을 실감했을 것이다. H200이 중국 땅을 밟는 날이 오면 한국 반도체 시장에도 꽤 큰 파장이 올 거다. 그날이 언제인지는, 아직 아무도 모른다.